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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2023)가 보여주는 양심과 과학의 경계 2023년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는 단순한 전기 영화나 전쟁 영화가 아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복합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수식이나 역사적 사건보다도, 한 사람의 고뇌와 불안, 양심의 흔들림이 훨씬 더 크게 다가왔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이 영화 속에서 과학이 가진 양날의 검을 아주 날카로운 방식으로 꺼내 보인다.과학은 그 자체로 무죄일까?과학이 ‘선’인지 ‘악’인지는 늘 혼란스럽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지만, 동시에 전쟁 무기와 감시 기술도 같은 맥락에서 발전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도 처음부터 파괴를 원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학문적인 호기심, 물리학의 가능성, 지식의 확장 같.. 2025. 3. 28.
재즈와 중독, 그리고 사랑 – 본투 비 블루(2016) 핵심 테마 처음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를 보았을 때, 나는 그다지 재즈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쳇 베이커라는 이름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고,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조용해졌다. 영화의 색감, 연기, 그리고 그 흐릿한 트럼펫 소리까지 모든 것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화면을 따라 조용히 번져나갔다. 재즈, 그 느슨하고 불안정한 아름다움재즈는 자유롭다고 한다. 정해진 답이 없고, 연주하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음악이 다르게 태어난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음악은 조금 달랐다. 자유롭다기보다는 불안정했고, 가볍다기보다는 지독히 외로웠다. 영화 속 그의 연주는 마치 말을 아끼는 사람의.. 2025. 3. 27.
위플래쉬(2015), ‘최고’라는 환상의 파괴 위플래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내 손 안의 뭔가를 꼭 쥔 채로 영화가 끝나길 바랐다. 무대 위에서 터지는 드럼 소리, 그와 함께 점점 조여오는 긴장,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집요함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건 음악영화라고 말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박자나 테크닉이 아닌, 그 안에서 무너지고 소리 지르고 뒤엉켜가는 감정의 이야기였다. 무엇이 한 사람을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드는 걸까? ‘최고’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주는 걸까? 나 자신을 밀어붙일수록 멀어지는 것들앤드류는 처음부터 완벽해지고 싶어 했다. 드럼이라는 악기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곧 집착이 되었다. 사랑하면 더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그는 점점 사람들과 멀어졌다. 친구들과도, 가족과도, 연인과도. 그리.. 2025. 3. 26.
샤인(1997), 천재성과 정신 질환의 경계 처음 ‘샤인(Shine, 1997)’을 봤을 땐, 그저 음악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감동 실화, 그런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오만한 예측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쉽게 넘겨짚는 ‘천재’라는 단어가 얼마나 위험한 신화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영화를 다 본 뒤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게 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주인공 데이비드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눈빛으로 말하고, 손끝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그 짧은 순간들 사이에서 감정이 폭발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2025. 3. 25.
어린이의 재능과 어른의 욕망 –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9) 비평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른 문장이 하나 있었다. “아이의 재능은 아이의 것일까, 어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 2019)’는 단순한 감성영화가 아니다. 보는 내내 무언가 껄끄럽고, 조용하지만 무거운 질문을 자꾸 던져온다. 교사인 리사와 다섯 살 시인 지미의 관계는 아름답기보다는 위험하고, 따뜻하기보다는 서늘하다. 어른의 감탄이 때로는 침범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집요하게 보여준다. 아이의 언어를 어른이 설명하려는 순간지미가 읊조리는 시는 놀랍다. 정말로 놀랍다. 하지만 그 시를 듣고 감동하는 어른들은 너무 빠르게 그 의미를 해석하고, 분류하고, 방향을 정하려 한다. 가장 먼저 그렇게 한 사람이 바로 리.. 2025. 3. 24.
프랑스 로맨스 영화의 정점, 퐁네프(1992)의 연인들의 미학 영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프랑스 영화를 접하는 건 참 쉽지 않다. 막연하게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있을 때, 앞서 소개한 '러브 미 이프 유 데어'를 처음 봤고, 그 다음에 본 작품이 '퐁네프의 연인들' 이전에 '소년, 소녀를 만나다', 레오 까락스의 작품이다. 난해하고 어렵다. 확실히 일반적인 로맨스는 아니다. 프랑스 영화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감각적인 연출, 강렬한 감정선, 그리고 현실과 예술이 결합된 독창적인 스타일일 것이다. 1992년 개봉한 퐁네프의 연인들은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광기, 파리의 낭만과 황폐함이 교차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처음 접하면서, '하늘과 구름의 색을 자꾸.. 2025.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