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내 손 안의 뭔가를 꼭 쥔 채로 영화가 끝나길 바랐다. 무대 위에서 터지는 드럼 소리, 그와 함께 점점 조여오는 긴장,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집요함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건 음악영화라고 말하기엔 뭔가 이상하다. 박자나 테크닉이 아닌, 그 안에서 무너지고 소리 지르고 뒤엉켜가는 감정의 이야기였다. 무엇이 한 사람을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이게 만드는 걸까? ‘최고’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주는 걸까?
나 자신을 밀어붙일수록 멀어지는 것들
앤드류는 처음부터 완벽해지고 싶어 했다. 드럼이라는 악기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곧 집착이 되었다. 사랑하면 더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그는 점점 사람들과 멀어졌다. 친구들과도, 가족과도, 연인과도. 그리고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의 삶은 점점 단순해졌지만, 동시에 더 복잡해졌다. 단 하나의 목표만 남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가 되는 것.’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는 피가 묻은 드럼채를 놓지 않았고, 밤새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이 뒤틀리고, 귀에 고막을 찢는 소리가 울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건 무언가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단, 자신을 부수는 의식 같았다. 누군가는 그를 열정적이라 부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너무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토록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플레처의 방식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
플레처는 늘 한 발짝 앞서 있었다. 타인의 한계를 보는 데 천재적인 감각이 있었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정말로 제자들을 위해 그랬는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방식은 너무 날카로웠고, 때때로 잔인했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도 그를 완전히 미워하지 못했다. 그 안에도 어떤 고집스러운 믿음이 있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찾고 싶었던 건,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짜’였을지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부서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마치 누군가를 기억에 남기기 위해 수많은 이름을 지우는 일과도 같았다. 앤드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교육이라기보단, 실험 같았다. 어느 정도까지 사람이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기 인생에서 유일하게 건져 올릴 수 있는 찬란한 순간을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완벽을 원했지만, 자신의 손으로 만들 수 없기에 타인의 재능에 매달린 건 아니었을까.
마지막 연주, 그건 해방이었을까 합의였을까
영화의 마지막, 앤드류는 다시 무대 위에 섰다. 모든 걸 알고도, 플레처가 자기를 망가뜨리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도, 그는 다시 연주를 시작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놀랍게도 안도감을 느꼈다. 그것은 복수도, 순종도 아닌, 그냥 온전히 자기만의 연주였다. 플레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통제할 수 없는 한 연주자의 폭발. 그 둘 사이의 교감은 어떤 말도 없이 오간다. 눈빛, 호흡, 그리고 리듬. 누가 승자이고 패자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서로를 소모하며, 동시에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증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최악의 관계 안에서 어떤 진실이 탄생한다. 그걸 보고 있는 내가 다 흔들렸다. 무섭도록 아름답고, 슬프도록 완벽한 순간이었다. ‘최고’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찢기고, 멍들고, 버려진 끝에서. 그걸 보고 나서, 나는 최고라는 단어가 조금 무서워졌다. 우리가 흔히 꿈꾸는 성공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부수는지, 그리고 그렇게 얻은 것들이 정말로 우리가 원했던 건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위플래쉬는 말한다. “최고는 환상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속삭이기도 한다. “그 환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진짜를 찾아낸다.” 그게 희망인지, 절망인지. 그건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