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캅스, 2019년 개봉작, 연대, 폭력, 현실감, 여성 관객, 공감
걸캅스는 단순한 코믹 액션 영화로 보기엔 아까운 작품이다. 2019년 개봉 당시에도 "여성 영화"라는 프레임으로 다양한 평가가 오갔고, 지금 다시 돌아봐도 그 시선의 온도차는 여전하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비판했고, 누군가는 '현실을 반영한 연대의 이야기'라고 옹호했다. 나는 그 어느 쪽도 확실히 속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조심스럽게 내 안의 감정을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불편했던 시기, 나의 '알깨기'와 시작된 관심
한창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뉴스와 SNS에서 쏟아질 때, 나는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핑계로 그 흐름에 쉽게 합류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름대로 평등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내 삶이, 어떤 시점에서부터는 너무 닫혀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됐다. SNS에서 우연히 본 이야기 하나, 누군가의 경험담 하나가 '알을 깨는' 계기가 됐고, 내가 겪었던 일들이 사실은 폭력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걸캅스는 그런 나의 변화된 시각과 감정을 스크린 위에 투영해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가볍지 않은 현실을 유쾌하게 풀어내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특히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모습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성별을 언급하는 방식, 분명 아쉬웠지만…
걸캅스는 ‘여자 형사’라는 설정을 강조한다.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삼으며, 성별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면이 많다. 몇몇 대사는 다소 전형적이고, 성별 이분법적 프레임을 반복하는 듯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강조하려 한 본질은 따로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명확히 하고, 피해자들이 느껴야 할 죄책감을 사회 전체가 분노로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다. 미영의 대사는 그 핵심을 집약한다. "어쩌다 나쁜 놈들한테 당한 것뿐인데." 이 한 마디에 담긴 연대와 분노는,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구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와 이를 외면하는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이었다. 성별 문제를 넘어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 의미 있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불편함을 넘어서, 함께 나아가기 위한 시작
걸캅스를 보고 가장 깊게 남은 감정은 '불편함'이었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명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내가 침묵했던 건 아닐까?",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을까?" 걸캅스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구체적인 현실 문제를 다루면서도, 결국 관객 각자에게 자신만의 숙제를 안긴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본 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됐다.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연대를 배웠다. 걸캅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선을 분명히 긋고, 그 사이에서 필요한 것이 '함께하는 용기'임을 보여준다.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그게 진짜 연대의 시작이라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완벽하지 않은 영화, 그러나 필요한 영화
걸캅스는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스토리의 구조는 다소 평이하고, 캐릭터의 심리 묘사 역시 깊이 있게 다뤄지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디지털 성범죄라는 민감하고도 중요한 이슈를 대중적 언어로 끌어냈다는 데 있다. 특히 영화가 유쾌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세상의 수많은 '걸캅스'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거창한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싸우고 버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의 이야기가 주목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걸캅스는 바로 그런 변화를 향한 작은 걸음이었다. 아직은 미완성일지라도, 이 영화가 던진 질문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다시 봐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