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른 문장이 하나 있었다. “아이의 재능은 아이의 것일까, 어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 2019)’는 단순한 감성영화가 아니다. 보는 내내 무언가 껄끄럽고, 조용하지만 무거운 질문을 자꾸 던져온다. 교사인 리사와 다섯 살 시인 지미의 관계는 아름답기보다는 위험하고, 따뜻하기보다는 서늘하다. 어른의 감탄이 때로는 침범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집요하게 보여준다.
아이의 언어를 어른이 설명하려는 순간
지미가 읊조리는 시는 놀랍다. 정말로 놀랍다. 하지만 그 시를 듣고 감동하는 어른들은 너무 빠르게 그 의미를 해석하고, 분류하고, 방향을 정하려 한다. 가장 먼저 그렇게 한 사람이 바로 리사였다. 그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글에는 늘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감이 있었다. 그런 그가 지미라는 아이를 만났고, 그 아이는 그저 무심하게 시를 지었다. 그 시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노력을 들인 것도 아닌, 마치 숨처럼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다. 리사는 그 재능을 발견했을 때의 감정을 잊지 못한다. 그 감동이 너무 컸기에, 그 시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그 보호의 시작이, 점점 통제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시를 받아 적었고, 나중엔 시를 지어보라고 유도했고, 끝내는 아이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그를 위한 것’이라는 포장 아래 이뤄졌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불편해졌다. ‘좋은 의도’는 언제부터 위험한 것이 될까.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는 그 자부심은, 정말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쩌면 리사는 지미의 시에서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잔상을 본 건 아니었을까. 그 아이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시를 통해 ‘자기’를 지키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재능을 향한 보호와 집착은 종이 한 장 차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리사에게 공감한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어른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재능 있는 아이를 단 한 명이라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는 교묘하게 그 선을 넘어간다. 아이가 점점 말을 줄이고, 시를 스스로 떠올리지 않게 되면서, 그 ‘재능’이라는 것이 정말 아이 안에서 피어나는 것이 맞았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끊임없이 끌어낸 것인지 헷갈려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지미가 수영장에서 시를 읊고 있을 때였다. 마치 무아지경의 상태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무심한 흐름’ 같았다. 그걸 본 리사는 경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장면이 오히려 슬펐다. 아이는 몰랐다. 자신이 누군가의 열망을 지탱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른이 아이에게 바라는 순수함, 그건 정말 순수한 걸까. 가끔은 어른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아이에게서 찾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붙잡으려다 아이의 ‘지금’을 놓치는 건 아닐까. 리사가 지미를 데리고 도망치려 할 때, 그건 단순히 교육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건 욕망이었고, 소유였으며, 동시에 외로움이었다.
침묵하는 아이가 전하는 마지막 시
영화의 끝에서, 지미는 울었다. 그 울음은 말보다 강했고, 어떤 시보다도 명확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자기 감정을 충분히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시는 주어졌지만, 그의 말은 빼앗겼다. 리사는 아이의 시를 지켜내려 했지만, 정작 아이의 마음은 지켜주지 못했다. 그 아이의 침묵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표현이었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질문만이 가득했다. 나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본 적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그를 위해’ 대했다 할 수 있었는가. 혹시 나 역시도 누군가의 재능을 보며 나를 투영하지 않았는가. 그 모든 생각들이 무겁게 마음에 내려앉았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시를 다루지만, 사실은 말보다 중요한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어린이의 재능은 쉽게 해석되거나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켜본다는 이름으로 감시되고, 사랑이라는 말로 소유되기 쉽다. 어른은 때때로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통해 잃어버린 꿈을 복원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는 누구의 꿈도 복구해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과 리듬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 멀리서 지켜봐줄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