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처음 봤을 때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마주했을 때 더 깊이 다가오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잔잔한 드라마 같았던 영화가, 어느 날 문득 떠올랐을 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시간이 지나도 여운이 남고,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영화야말로 진정한 걸작 아닐까? 그래서 오늘은 이창동 감독의 <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려고 한다.
평범한 인물, 그러나 누구보다 특별한 이야기
영화의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평범한 60대 여성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도 않고, 특별한 커리어를 쌓은 것도 아니다. 손자를 돌보며 가정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어딘가에서 마주칠 법한 우리네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도 미자가 이렇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녀의 시선이 유난히 맑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미자는 어느 날 우연히 시 창작 수업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사소한 것들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꽃, 나무, 강물, 아이들의 웃음소리. 마치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손자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자신의 건강 문제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진실을 찾으려 한다. 그 과정이 참 묘하다.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먹먹하다.
윤정희의 연기,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작품
배우 윤정희는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시>를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 스크린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었고, 2023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다시 보는 <시>는 더욱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미자의 감정을 대사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눈빛, 표정, 작은 몸짓에서 수많은 감정이 읽힌다. 영화가 끝날 때쯤 그녀가 읊조리는 시는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그녀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연기는 기술적으로 뛰어날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한 배우의 삶이 녹아든 순간을 만들어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배우 윤정희의 마지막 선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창동 감독의 연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그 안에서 의미를 찾게 만든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미자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이 영화에서 감독이 택한 방식은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손자의 범죄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미자의 마지막 선택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모든 걸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관객은 그녀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시’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코 지나치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흔히 우리는 시를 예술로만 생각하지만, 영화 속에서 시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된다. 미자가 강가에서 나뭇잎 하나를 바라보며 떠올리는 감정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있는 감정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를 보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지는 기분이 든다.
2010년에 개봉한 <시>는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다. 단순히 한 노년 여성이 시를 배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삶을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윤정희의 마지막 연기, 이창동 감독의 섬세한 연출, 그리고 시적인 감성이 어우러진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사실 우리는 늘 바쁘고, 때로는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시>를 보고 나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마지막으로 언제 진짜 세상을 바라보았을까?' 어쩌면 우리도 미자처럼, 잠시 멈춰서 사소한 것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2024년, 다시 한번 이 영화를 꺼내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