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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2019), 90년대 한국 사회를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 분석

by cheda-cheeese 2025. 3. 17.

누군가 내게 "9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최고의 성장영화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9)를 꼽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199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는 사회, 가족, 개인의 감정을 밀도 높게 담아내며, 우리 모두의 기억 한편에 자리한 감정을 건드린다. 그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조용히 관통하는 영화. 오늘은 <벌새>가 어떻게 90년대 한국을 섬세하게 담아냈는지 살펴보려 한다.

 

1994년, 변화의 기로에 선 한국 사회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4년은 한국 사회에 중요한 사건들이 많았던 해다. 성수대교 붕괴, 천주교 인권운동, 경제적 변화 등이 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시기로 남아 있다. <벌새>는 이런 사회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지만, 영화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린다.

주인공 은희(박지후)는 중학생이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영화는 그 평범함 속에 존재하는 불안을 포착한다. 은희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가족 안에서도 자신의 자리가 어딘지 확신하지 못한다. 부모님은 경제적 문제로 바쁘고, 오빠는 폭력적이며, 언니는 자신의 길을 찾느라 분주하다. 은희는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조용히 세상을 탐색하고 있다.

이러한 은희의 감정은 90년대 당시 한국 사회가 가진 공기와 맞닿아 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그만큼 개인은 고립되었고,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많은 이들이 말하지 못한 채 감정을 삼켰다. 영화 속 은희의 표정, 침묵, 그리고 그녀가 머무는 공간들은 그 시대를 그대로 담아낸 듯하다.

가족과 개인 –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영화에서 은희의 가족은 전형적인 90년대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 폭력적인 오빠, 그리고 자기 앞가림을 하기에 바쁜 언니까지. 가족은 분명 가까운 존재이지만, 정작 은희는 그 안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가족 간 대화가 많지 않았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은희 역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워한다. 그녀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그 감정을 말로 꺼내지도 못한 채 조용히 애정을 갈구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은희의 외로움이 가족 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친구 관계 역시 쉽게 변하고, 연애에서도 기대했던 따뜻함을 얻지 못한다. 세상은 늘 변화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 그것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막막함과 닮아 있다.

선생님 ‘영지’와의 만남 –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다

그런 은희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가 나타난다. 바로 한문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다. 영지는 기존의 어른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은희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낀다.

하지만, 은희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영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이는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희망이 쉽게 꺼져버리는 현실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종종 그 희망은 너무 빨리 사라진다. 마치 성수대교 붕괴처럼,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들. <벌새>는 이를 통해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상을 조용히 투영한다.

90년대의 공간과 색감 – 디테일이 살아있는 연출

영화는 9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히 레트로 감성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도록 작은 디테일들을 배치한다.

예를 들어, 집안의 가구 배치, 학교 앞 문방구, VHS 테이프, 삐삐와 공중전화 같은 소품들은 당시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카메라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공기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

또한, 영화의 색감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하다. 붉은 기가 감도는 조명과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은 은희의 감정선과 맞물려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단순한 색감의 선택이 아니라,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연출 방식이다.

 

<벌새>는 단순한 성장영화가 아니다. 90년대 한국 사회의 공기를 담아낸 작품이며, 그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세한 기록이다. 은희의 조용한 성장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가 지나온 길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우리가 느꼈던 감정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벌새>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그 감정들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 아닐까?